2008년 8월 3일 일요일

몇번이고 다시 본 영화 - 동사서독

1. 동사서독 (Ashes of Time), 東邪西毒

http://www.cine21.com/Movies/Mov_Movie/movie_detail.php?id=2369

http://kinocine.com/60

학부생 때 왕가위 감독의 열혈 팬이었다. 팬이된 계기는 중경삼림이라는 영화를 보고나서. 중경삼림을 어떻게 보았더라...? 아마 -_- 기숙사 동료인 시커먼 남자녀석과 비디오 방에 가서 보고 온 거로 기억이 어렴풋이 나기도...

왕가위 감독이 즐겨 캐스팅하는 양조위, 장국영, 장학우, 장만옥 등이 출연했다. 전매특허인 크리스토퍼 도일감독과 함께한 스탭프린팅 촬영기법에, 장중한 OST (CD 를 2장이나 샀었다.) 까지.

정말 대사를 다 외우고, 등장인물들의 극중이름도 다 외우고, 감독판도 따로 보고 몇번이고 보고 또 본... 감동의 명작.

사조영웅문이라는 고전 컨텐츠가 지붕을 이루고 있지만, 이야기의 근본은 맺어지지 못한 사랑에 대한 쓸쓸함과 애틋함, 그리고 비정한 현실에서의 애절함, 파괴되어져 가는 감정, 무언가 이루어 나가는 사람에 대한 시기와 질투심, 미묘한 분노, 하지만 마지막에는 일말의 희망.

모든 만남이 교차해 가는 사막.

보면 볼수록 이 정서에 중독되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에 미쳐 있을 당시만 해도 영화평도 제법 남에게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써대었었는데 ;-) - 과수원 bbs (math1) 또는 noah bbs 에 올렸던 것 같다.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좋아하는 점괘, '불이 쇠를 이기니 서쪽이 길하니라' 라는 것이 영화 마지막에 나오기 때문.

이 영화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명장면은 맹무살수의 마지막 전투 scene 이다. (내 해석을 덧붙였다.)

맹무살수: 그 여자가 날 위해 울어 줄까?
(마적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맹무살수를 찾아온다. 맹무살수는 마적대
들과 싸우던 중 시력을  완전히 잃고, 도화삼랑의 환영을  보며 칼에 맞아
죽는다.)

구지신개 로 불리게 되는 북개 홍칠공을 표현할 때에는 강렬한 스탭프린팅 (촬영한 액션신 필름 중 중간중간을 커팅해서 날리고 연결지어서 프레임 전개 속도를 빠르게 하는 왕가위 특유의 촬영기법, 우리나라 영화 중에서는 비트 에서 이 기법을 채용하였음) 으로 모든 동작이 전광석화 처럼 빠르게 묘사한 반면, 맹무살수의 동작은 느리게 느껴지리만큼 풀 모션을 잡았다.

맹무살수는 이 당시 눈이 거의 안보이게 되었으나, 눈이 완전히 보이지 않기 전에 한번만이라도 부인을 보기 위해 고향에 돌아갈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서독을 찾아가게 되었고, 시력은 마적단과의 결전을 앞두고 거의 상실한 상태가 되었다. - 복사꽃이 지기 전에 고향에 가야 할텐데 라고 되뇌이는 것은 실은 동사와 바람을 핀 도화삼랑 (극중에서 복사꽃이라고 하는 것은 실은 부인 '도화' 를 일컫는 것이다.) 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시 한번 보고픈 애틋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부인은 만나고 싶지만 만나기가 이제 불가능해졌다라는 걸 알고 결전에 나가기 직전 완사녀를 끌어안는다. 그리고 되뇌인다. 그녀가 나를 위해 울어줄까... 이제 전투에 나가 눈이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으면서도 필사적으로 마적단과 싸운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 걸까. 왜 부인은 동사와 바람을 피웠는가. 나는 왜 화도 제대로 못내고 내가 잘못한게 없으면서 도리어 내가 고향과 부인을 떠나게 되었을까. 눈도 멀어가고 한물간 무사여서 자신감이 없어지고 위축되어서 일까.

왕가위의 멋진 영화속 장치가 여기에 드러난다. 전투에 나갈 때 바람이 조금 불며 천막이 펄럭인다. (천막 안에서 천막 천정을 바라보며 찍었다.)

마지막으로 전투중 눈이 아예 안보이게 되고 이때 목에 칼을 맞게 된다. 그토록 보고 싶어했던 부인은 죽는 순간 하늘을 올려다 볼 때 비로소 부인의 모습을 환상으로라도 보게 된다.  이때 푸드득 새들이 날아가고 부인은 호숫가에서 말에 물을 먹이다가 같은 하늘을 올려다 보게 된다. 이제 천막은 완전히 열려서 파란 사막의 하늘이 보이게 된다. 바람에 찢겨 펄럭이는 천막 지붕의 모습은 마치 눈동자 같다. 눈동자가 활짝 열려 청아하기 그지 없는 사막의 푸른 하늘이 보인다.

비록 시력은 완전히 잃었지만 도리어 영혼을 짓누르던 마음의 눈꺼풀은 열려 푸른 하늘을 환히 바라보게 되고 부인과 같은 하늘을 순간 바라보고 비로소 부인을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을 상징한다고나 할까.

비고) 맹무살수의 삶은 너무 동사와 악연으로 얽혀있다.

동사와 한때는 친구였으나 동사는 자신의 부인인 도화삼랑과 정을 통했고, 서독의 의뢰를 받은 마적대 퇴치도 마적대가 실은 동사에 의해 큰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마적대가 복수를 위해 계속 쳐들어 온 것이니 맹무살수가 의뢰를 맡은 마적대 소탕의 건은 동사에 의해 유래된 것이라 볼 수도...

비록 무엇하나 시원한 바람같은 삶은 아니었으나 죽는 순간에 부인과도 무의식중인 교감이 되어 같은 하늘을 보았고 부인 역시 결국은 지난날을 후회하며 맹무살수가 돌아오기를 그리고 있었다고 볼수도 있으니... 이 사랑도 비록 이루어지지 못한 안타까움은 있지만 그래도 여한이 없길.

그리고 이런 극중의 모든 연은 다 사막에 홀로 외로이 은둔하고 있는 서독이라는 교집합을 통해 연이 주고 받아진다는 점이 절묘하다.

홍칠은 북으로 떠났고 (서독 구양봉은 이날 점괘에 북쪽이 길하다 했다) 훗날 성장하여 구지신개라 일컬어지는 개방의 방주가 된다. 검을 잡을 수 없기에 녹옥죽봉을 쓴다.

동사는 도화도주가 되고, 서독 구양봉은 백타산주가 되어 서독의 사막 외로운 객잔을 거쳐간 모든 이들은 다 한 시대를 풍미하게 된다.

극중 내내 서독은 점괘를 쳐서 자신의 앞일을 결정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은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낙담한 후 삶을 자포자기 하며 막장인생으로 살아가고 있기에 자신의 삶에 자신이 없어 점괘에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우유부단한 자신을 알기에 점괘를 따라 결정을 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지막 결심을 하고 취생몽사를 마시고 난 뒤,  자신의 새로운 운명을 개척하러 떠나며 자신의 방황과 은둔시절, 그리고 이루지 못한 자신의 사랑과 우유부단의 상징인 사막 객잔을 불태운다. '불이 쇠를 이기니 서쪽이 길하니라' 라는 마지막 점괘에 의지하여 서쪽으로 떠나 훗날 서독이라 불리우는 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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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도 일단 올려본다. 나와 너무 동화가 되어 내 가슴을 그토록 저리게 했던 명대사/명scene 은 색깔로 표시를 따로 했다.

 

                       동사서독

                    Ashes Of Time

감독: 왕가위
각본: 왕가위
제작: 진폐화
기획: 라문, 서소명, 고기화
촬영: 크리스토퍼 도일(두가풍)
편집: 담가명, 장숙평, 계걸위, 광지량
음악: 진훈기 & Roel A. Gracia
미술: 구위명
무술 지도: 홍금보
주연 : 張國榮(장국영) ----- 서독(구양봉) 역
         梁家輝(양가휘) ----- 동사(황약사) 역
         林靑霞(임청하) ----- 모룡연, 모룡언 역
         梁朝偉(양조위) ----- 맹무살수 역
         張學友(장학우) ----- 홍칠공 역
         劉嘉玲(유가령) ----- 도화삼랑 역
         張曼玉(장만옥) ----- 자애인 역
         楊采니(양채니) ----- 완사녀 역

[구양봉과 어떤 사람들이 싸우는 장면]

구양봉(장국영): 훗날 나를 서독이라 부를 것이다.
                지나치게 강한 질투심은 사람을 바꾸어 놓기도 한다.
                남들이 나보고 뭐라고 하든 그들이 나보다 즐거운 게 싫다.

[마적대들과 황약사의 싸움 장면]                                       

구양봉: 그는 거만한 사람이라서 질투심이 없는 줄 알았다.
        나는 오래 전에 그와 알게 되었고
        그는 늘 동쪽에서 나타났기에 동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사막]

구양봉: 금년엔 오황이 태세를 만나서 천하가 가뭄에 시달렸다.
        가뭄을 당하면 문제가 생기고 나도 일거리를 얻게 된다.
        나는 문제 해결이 직업인 구양봉이란 사람이다.

[구양봉의 집]

구양봉: 나이가 40대 초반이군요.
        살다 보면 들추기 싫은 일이나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이 있죠?
        당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죽이고 싶었던 적도 있을 테고?
        하지만 용기가 없었군요.
        아니면 필요성을 못 느꼈던가.
        살인은 아주 쉽소.
        무공은 뛰어나지만 형편이 어려운 친구가 있는데
        돈만 조금 주면 그 사람을 죽여줄 거요.
        잘 생각해 보시오.

[사막]

구양봉: 살인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먹고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쓴다.
        나는 백타산을 떠나 사막에 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황약사가 말 타고 사막을 달려옴

구양봉: 매년 경칩을 즈음해서 한 친구가 술 마시자고 찾아온다.
        그의 이름은 황약사이다.
        그는 이상하게도 매번 동쪽에서 왔다.
        몇 년 동안 계속 그랬다.
        금년엔 선물을 가지고 왔다.

[구양봉의 집]

황약사(양가휘): 얼마 전에 어떤 여자가 술 한 병을 주었는데
                 술 이름이 취생몽사야.
                 마시면 지난 일을 모두 잊는다고 하더군.
                 난 그런 술이 있다는 게 믿어지질 않았어.
                 인간이 번뇌가 많은 까닭은 기억력 때문이란 말도 하더군.
                 잊을 수만 있다면 매일 매일이 새로울 거라 했어.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어?
                 자네 주려고 가져온 술이지만 나눠 마셔야 할 것 같군.

구양봉: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이 취생몽사를 마시지 않았다.
        효과가 있었던 걸까?
        그날 이후로 황약사는 많은 일을 잊었다.

며칠이 지나고

구양봉: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

황약사: 기억 안나.

구양봉: 여기에 어떻게 왔는지는?

황약사: 모르겠어.

구양봉: 왜 자꾸 새장을 쳐다봐?

황약사: 무척 낯이 익어.

[장면 전환] 식탁에 취해 엎드려 잠든 황약사는 한 여인의 꿈을 꿈

구양봉: 그날 그는 잔뜩 취했고 다음날 아침 일찍 떠났다.
       그가 왜 취생몽사를 가져 왔는지는 모르지만 무슨 걱정이 있는 것 같다.
       그는 날 만나고 나면 매번 누군가를 만나러 간다.

[어떤 산]

구양봉: 한달 후 황약사는 먼 곳으로 갔다.
        그 곳은 친한 친구의 고향이다.

(황약사, 도화삼랑(유가령)과 계곡에서 마주침)

구양봉: 친구가 혼인하던 해에 황약사는 그곳에서 거처했다.
        어느 날 친구가 집을 떠나자 황약사도 그 곳에 가지 않았다.

도화삼랑과 황약사 서로 마주보다가 도화삼랑이 말을 몰고 떠남

[한 객잔]

황약사: 술 한잔 권해도 되겠나?

맹무살수(양조위): 오늘은 물이나 마시겠네.

황약사: 우린 아는 사이인가?

맹무살수: 옛날에 자네와 난 절친한 친구였어.
           하지만 지금은 아냐.
           여긴 왜 왔나?

황약사:  얼마 전에 어떤 사람이 술을 줬는데, 술 이름이 취생몽사야.
         마시면 지난 일을 모두 잊는다고 하지.
         난 그런 술이 있다는 게 믿어지질 않았어.

맹무살수: 술과 물의 차이점을 아나?
          술은 마시면 몸이 달아오르고 물은 마시면 몸이 차가워지지.

황약사: 우린 또 만나겠지?

맹무살수: 아니.

(객잔을 나오는 맹무살수, 벽을 짚고 더듬거리며 어두운 길을 간다.)

맹무살수: 이자를 다시 만나면 꼭 죽이겠다고 맹세했지만
          시력이 나빠진 뒤에야 만나서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장면 전환][그 객잔]

술집 종업원: 남자야, 여자야?

모용언(임청하):지엄하신 대연국의 공주이며 모용 가문의 규수인 내게
                이런 무례를 범하다니.
               내 손에 죽고 싶은가?

(칼을 빼려는 모용언를 황약사가 저지한다.)

황약사: 취하셨군요

(모용언, 황약사를 공격해 상처를 입힌다.)

(도망쳐 나온 황약사)

맹무살수: 기억력이 나쁜 사람은 남의 일에 관여해선 안된다.
          원수까지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날 황약사는 죽을 뻔했다.

(모용언 마구 웃는다.)

[사막], [구양봉의 집]

구양봉: 누구나 1년중 몇 달은 죽음이 두려운 모양이다.
        입춘 후에 난 전혀 일이 없었고 한달 동안 손님은 1명뿐이었다.

[장면전환]

모용연: 황약사라는 사람을 죽여주시오.

구양봉: 그는 뛰어난 검객이라 죽이기가 쉽지 않을 거요.

모용연: 그를 죽여만 준다면 어떤 대가도 치르겠소.
        하지만 가장 고통스런 모습으로 내 손에 죽게 해줘야 하오.

구양봉: 왜 그렇게 그럴 저주하시오?

모용연: 한 여자 때문이오. 그는 내 여동생을 버렸소.

모용연과 황약사의 장면 회상, 둘이 술을 마시고 있다.

구양봉: 그의 이름은 모용연이고 모용 공자의 후손이라 했다.
        그는 고소성 밖 도화림에서 황약사와 만나 친구가 됐다.
        그날은 겨울이 끝나고 새 봄이 시작되는 입춘이었다.
        어느 날 밤 황약사는 그에게 농담을 했다.

황약사: 자네에게 여동생이 있다면 꼭 내 처로 맞이하겠네.

모용연: 좋아, 약속 지키게.
        하지만 절대 후회하지마.
        후회하면 내가 죽일 거야.

(사막. 모용연의 여동생인 모용언이 새장이  걸린 나무 앞에서 황약사를 기다리고 있음)

구양봉: 후에 그녀와 만나기로 했는데, 황약사가 약속을 어겼다.

(울부짖는 모용언)

[구양봉 집]

모용언: 제 오라버니가 찾아왔었나요?

구양봉: 낭자의 오라버니가 누구요?

모용언: 모용연이라고 해요.

구양봉: 왔었소.

모용언: 누굴 죽이라고 했죠?

구양봉: 모르겠소.

모용언: 그를 죽이는 날엔 당신도 살아남지 못해요.

구양봉: 큰 돈을 제시했기 때문에 거절하면 난 큰 손해를 입소.
        지금은 큰 돈을 주면서 살인해 달라는 사람이 별로 없소.

모용언: 일을 못하겠다고 하면 제가 2배로 보상해 드리죠.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제 오라버니 모용연을 죽여주세요.

구양봉: 남매간의 감정이 묘하군요. 그렇게 오라버니가 싫소?

모용언: 그래요, 저와 황약사를 못 만나게 해요.
        나를 자신의 소유로 생각해요
        그래서 죽여야 해요!

다음날, 모용연

모용연: 내 여동생이 찾아 왔었소?

구양봉: 그렇소.

모용연: 동생에게 흑심 품었다가는 당신도 죽을 줄 아시오.

구양봉: 동생 걱정을 마니 하는군요.

모용연: 유일한 혈육이라 돌봐야 하오.
        왜 당신을 찾아왔죠?

구양봉: 누군가를  죽여 달랬소.
        이름은 모용연이오.

모용연: 황약사가 시켰을 것이오.

구양봉: 동생 스스로가 원한 일이오 당신을 벗어나고 싶어했소.

모용연: 내가 죽기 전엔 벗어날 수 없을 것이오.

구양봉의 집안 새장 옆

모용언: 오늘 오라버니를 만났죠?

구양봉: 그가 말했소?

모용언: 왜 안 죽였어요?

구양봉: 돈을 못 받을까 봐서요.
        그는 약점이 있어서 죽이는 건 문제가 아니오.
        약점이 뭔지 아시오?
        바로 낭자요.
        낭자가 죽이라고 했다고 한 뒤 그의 반응을 살펴봤죠.
        황약사와 못 만나게 하는 건 낭자를 좋아하기 때문이오.
        당신을 얼마나 좋아하죠?

모용언: 평생 같이 있기를 바래요.

구양봉: 많이 좋아한다는 것이군요?

모용언: 하지만 전 아니에요. 전 황약사를 좋아해요

구양봉: 오라버니가 슬퍼하겠군요?

모용언: 슬퍼하라고 해요.
        왜 그를 못 만나게 해서 날 우울하게 만드는 거죠?
        사랑을 못 이루는 고통을 느끼게 할거예요

구양봉: 잔인하군요. 그가 죽어도 괜찮겠소?

모용언: 죽기를 바래요
        왜 저한테 그런 말을 하죠?

구양봉: 오라버니의 요구 조건을 오랫동안 생각했었소.
        남자는 연인의 죽음을 보면서 죽을 때가 가장 고통스럽소.
        하지만 낭자를 죽이면 돈을 못 받기에 그럴 순 없소.
        그렇지 않소?

며칠 후 구양봉 집, 모용언이 구양봉의 집으로 도망쳐 온다.

구양봉: 왜 갑자기 낭자를 죽이려 하죠?

모용언: 황약사가 좋아하기 때문이에요.
        절 살려주세요.

구양봉: 그 날밤 그녀는 가지 못했고 난 두려워 말라며 술을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잠들었다.

며칠 후

모용연: 내 동생을 어디에 숨겼소?

구양봉: 왜 여기 있다고 확신하오?
        당신을 만난 후에 아무도 동생을 보지 못했소.
        누가 죽이려 한다며 어느 날 밤 찾아왔었소.
        하지만 곧 떠났소. 집에 안 갔소?

모용연: 동생은 아무와도 원한이 없는데 쫓기는 이유가 무엇이오?

구양봉: 황약사가 가장 좋아하는 여자이기 때문이라고 했소.

모용연: 말도 안돼. 좋아한다면 그가 떠났겠소?

구양봉: 어떤 사람들은 떠난 뒤에야 사랑했었다는 걸 깨닫죠.
        황약사가 그런 사람이오.

모용연: 아니오!

구양봉: 왜 그렇게 확신하오?

모용연: 그는 다른 여자를 좋아하오.

[구양봉 집]

구양봉: 사람들은 좌절하면 자기 변명을 늘어놓게 된다.
        모용언과 모용연은 두개의 모습을 지닌 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의 정체는 상처받은 사람인 것이다.

구양봉: 취했소, 모용연.

모용언: 모용연!
        잘못 봤어요. 전 모용연이 아니에요.
        지엄한 대연 국의 공주이고 모용가의 규수인 모용언이라고 해요.
        당신은 누구세요?

구양봉: 날 모르시오?

모용언: 저와 혼인하겠다는 분을 왜 모르겠어요?

구양봉: 내가 그런 말을 했소?

모용언: 그날 고소성 밖 복사꽃 아래서
        술을 마시다가 취해서 제 얼굴을 어루만지며
        여동생이 있으면 처로 맞이하겠다고 했잖아요.
        제가 여자인 걸 알면서 왜 그러셨어요?

(모용연 차림을 한 모용언은 구양봉을 황약사로 착각하고 있다.)

구양봉: 술에 취해서 한 말을 믿었소?

모용언: 당신의 그 한마디 때문에 전 지금까지 기다렸어요.
        절 대려 가 달라고 했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았어요.
        두 여자를 사랑할 순 없다고요?
        모용언을 사랑하면서 어떻게 다른 여자를 사랑하죠?
        전 그 여자를 찾아갔었어요.
        당신이 그 여자를 사랑한다기에 죽이려고 했지만 관뒀어요.
        그 여자를 사랑한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서요.
        당신이 정말 날 사랑하는지 수없이 자문해 봤었지만
        이젠 알고 싶지도 않아요.
        어느 날 견디지 못하고 물어 보면 거짓말이라도 해주세요.
        '당신은 내 사랑이 아니야' 라곤 절대 말하지 마세요.

구양봉: 그 날밤은 무척 길었다 두 사람과 얘기하는 것 같았다.
        그 뒤 난 그가 모용언인지 모용연인지 분간이 안됐다.

구양봉의 집. 넋을 읽고 있는 모용언/연

구양봉: 모용언.
        모용연!

모용언: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 누구죠?

(모용언은 정신이 나가서 구양봉을 황약사로 착각하고 있음)

구양봉: 당신이오.

구양봉: 예전에 이 질문을 받았을 땐 대답을 못했었다.
        하지만 황약사의 신분이 되니 별로 어려운 말도 아니었다.

어느 날 밤, 구양봉의 숙소로 모용언이 건너온다.

구양봉: 그 날밤 자고 있을 때 누군가가 날 만지는 걸 느꼈다.
        그녀는 날 만지는 게 아니라 내 몸만을 빌린 것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손길은 형수님의 손길처럼 따뜻했다.

(모용언/연은 구양봉을 황약사로 생각하고 만지고, 구양봉은  자신을 만지
는 사람이 형수라고 상상하며 가만히 있다.)

[낮, 사막]

구양봉: 그날 이후 모용연이나 모용언을 만났다는 사람은 없었다.
        수년 후에 강호엔 이상한 검객이 출현했는데
        아무도 그의 내력을 몰랐고

(사막 호수에서 검술을 익히는 모용언/연의 모습)

        그는 혼자 검술을 익힐 뿐이었다.
        그는 독고구패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장면 전환] [구양봉 집]

구양봉: 날 찾았소?

완사녀(양채니): 남동생의 복수를 하고 싶어요.

구양봉: 동생이 어떻게 됐소?

완사녀: 며칠 전에 검객들이 저희 집 문 앞을 지나갔는데
        철모르는 동생이 그중 한 명에게 실수를 했어요.
        그들이 동생을 죽였죠.

구양봉: 관가에선 가만히 있었소?

완사녀: 그들은 태위부의 검객이라 관가에서도 손을 못 써요.

구양봉: 돈은 얼마나 낼 수 있소?

완사녀: 집이 가난해서 돈은 없고 달걀과 당나귀가 다예요.
        당나귀는 어머니께서 생전에 남기신 제 혼수예요.

구양봉: 동생의 복수를 하려거든 돈을 마련하시오.
        당나귀 한 마리 벌자고 태위부의 검객과 싸울 순 없소.
        복수는 대가를 치뤄야하오.
        낭자가 못생겼다면 포기하라고 했을 꺼요.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오.
        내다 팔기에는 낭자가 당나귀보다 비쌀 거란 얘기요.
        무슨 뜻인지 알겠소?

완사녀: 그럴 수는 없어요.
        돈이 적다고 하신다면 여기서 기다리겠어요.
        꼭 누군가가 도와줄 거예요.

구양봉: 그녀가 정말로 동생의 복수를 하려고 저러는 건지 모르겠다.
        신념을 지키려는 사람의 모습이 때론 시간 낭비로 느껴진다.
        하지만 그녀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점에서 보면 그녀는 누군가와 닮았다.

(자애인이 비춰짐)

        그 후에 매일 밤 복사꽃이 핀 고향의 정경을 꿈꾸었다.
        그때서야 백타산에 오랫동안 안 가 봤다는 걸 깨달았다.

맹무살수가 말을 달려 구양봉에게로 온다.

구양봉: 눈에 무슨 문제가 잇나?

맹무살수: 난 어려서부터 눈이 나빴지.
           의원이 30이후엔 실명한다더군.

구양봉: 금년에 몇인데?

맹무살수: 정확히 30이야.

구양봉: 그런데 왜 왔어?

맹무살수: 해마다 봄이면 고향에는 복사꽃(도화)이 찬란하게 피지.
          실명하기 전에 보고 싶은데 경비가 다 떨어졌어.
          자넨 문제를 해결해 준다던데 날 도울 수 있겠나?

구양봉: 몇 달 전에 내 친구가 여기서 마적대를 물리쳤지.
        마적대가 복수하러 온다는데 내 친구는 이미 떠났어.
        마을 사람들은 화가 미칠까 봐 그들을 죽일 고수를 사겠지.

맹무살수: 고수가 있다던데 아직 있는지 모르겠군.

구양봉: 그를 왜 찾나?

맹무살수: 누가 빠른지 겨뤄 보고 싶어.

사막, 두 사람이 서로 겨루려 한다.

맹무살수: 내가 잘못 왔군.

어떤 무사: 후회하기엔 너무 늦었어.

맹무살수: 팔만 자르는 건가?

그 무사: 자를 바엔 목을 잘라야지.

(둘이 싸우고 맹무살수가 한칼에 이긴다.)

맹무살수: 넌 오해했어, 넌 내 상대가 안돼서 잘못 왔다고 한 거야.
          팔만 자른다고 했는데 왜 목까지 내놓았지?

[구양봉의 집 앞]

완사녀: 저를 도와주실 수 없나요?

(맹무살수는 말을 몰고 그냥 지나침)

[구양봉 집]

구양봉: 그는 한물 간 검객이지만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매일 와서 술 한잔 마시고 밥 두 그릇 먹고
        저녁이 되면 돌아간다.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 완사녀)

구양봉: 왜 자꾸 저 여자를 쳐다보나?

맹무살수: 그녀를 보면 누군가가 생각나.

구양봉: 자네 처?
        그렇게 그리워하면서 왜 떠도나?

맹무살수: 그녀는 내 친구와 정을 통했어.
          마적대는 언제 오지?

구양봉: 며칠 내에 올 거야.

맹무살수: 복사꽃이 시들 기전에 빨리 와야 할텐데..

(맹무살수, 빛을 잃어버리다.)

구양봉: 꽃은 언제 피는지 알 수 있지만 마적대는 언제 올지 알 수 없다.
        그는 매일 성 밖에서 늦게까지 기다렸다.
        그는 밤마다 등불을 켰지만 밤에는 물체를 식별도 못했다.

[장면 전환]

완사녀: 제가 싫으세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죠?

맹무살수: 그래.

완사녀: 혼인했어요?

맹무살수: 왜 그렇게 묻지?

완사녀: 부인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

맹무살수: 그렇다고 할 수 있지.

완사녀: 그런데 왜 같이 있지 않죠?

[장면 전환]

맹무살수: 술 한잔 더 주겠나?

구양봉: 오늘은 술이 당기는 모양이지?

맹무살수: 내일은 못 마실것 같아.

구양봉: 새벽녘에 도착할 것 같군. 내가 등불을 준비했네.

맹무살수: 등불의 유무는 내게 무의미해.

구양봉: 이제 아무것도 안보이지?

맹무살수: 태양이 강렬할 때는 보여. 내일 날씨가 좋기를 바래야지.
          내가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으면 나 대신 사람을 찾아 주게.
          그의 이름은 황약사야.
          누가 시골에서 기다린다고 전해.

(말을 끌고 떠나려는 맹무살수, 밖에서 완사녀에게 강제로 키스한다.)

맹무살수: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자제할 수가 없었다.
          떠날 때 내 얼굴에 묻은 그녀의 눈물이 마르는 것이 느껴졌다.

(도화삼랑을 비춤)

          그 여자가 날 위해 울어 줄까?

(마적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맹무살수를 찾아온다. 맹무살수는 마적대들과 싸우던 중 시력을  완전히 잃고, 도화삼랑의 환영을  보며 칼에 맞아 죽는다.)

          검이 빠르면 피가 솟을 때 바람소리처럼 듣기 좋다던데.
          내 피로 그 소리를 듣게 될 줄이야.

황약사 혼자 술을 마시고 있다.

황약사: 그날 이후로 그 친구는 다시는 오지 않았다.
        나는 그를 만나러 갔지만 죽을 때까지도 날 용서 안했다.

[홍칠공이 싸우는 장면]

구양봉: 이 사람의 이름은 홍칠. 칼 솜씨가 아주 빠르다.
        그는 신발을 신지 않는다.
        내게 보탬이 될 줄은 알지만 난 이 사람이 싫다.
        내 운세에서 숫자 7을 만나면 명이 끝난다고 했기 때문이다.

[구양봉 집]

구양봉: 내가 그를 만난 건 그가 막 시골에서 왔을 때였다.

구양봉: 내가 왜 밥을 주는지 아나?

홍칠공: 모르오.

구양봉: 배가 고픈걸 알기 때문이야.
        난 자네를 오랫동안 지켜봤어. 벽 밑에서 반나절이나 있었지.
        아픈 것 같진 않군.
        자네처럼 무공을 조금 한다고 천하를 우습게 보는 이는 많지.
        강호를 떠도는 건 힘든 일이야.
        무공을 알면 많은 일을 못하지.
        밭 갈긴 싫지?
        산적 짓도 못하고.
        약장사는 더욱 하기 싫을 텐데 어떻게 살 거야?
        무공 고수도 밥은 먹어야 해.
        자네에게 맞는 일이 있어.
        돈도 벌고 의로운 일이지 어때?
        잘 생각하고 빨리 결정하게.
        배는 금방 또 고파져.

마적대들이 오고 있다.

구양봉: 홍칠이 오고 얼마 안돼서 마적대는 다시 왔다.

[마을]

구양봉: 홍칠을 마을로 데려가기 전에 신발을 사줬다.
        신발을 신은 검객이 더 비싸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 앞에서)

구양봉: 10냥이 비싸다는 거요?
        그럼 싼 사람을 찾으시오. 저쪽에 몇 명 있군.
        몇 냥만 줘도 좋아 할거요.
        신발도 안 신은 검객을 믿을 수 있소?
        만약 저들이 실패해서
        당신들이 시킨걸 마적대에게 누설하면 어찌될 것 같소?
        내 친구의 무공이 저들보다 낫다고 장담은 못하겠소.
        하지만 이 일에 20여명의 목숨이 걸려 있소.
        이 점만으로도 신발 신은 검객을 믿어야 하오.

[어떤 시체 앞]

구양봉: 실수가 반복되지 않도록 홍칠과 함께 어떤 곳에 갔다.

홍칠공: 왜 시체를 보여주시오?

구양봉: 어떻게 죽었는지를 말하고 있어.
        이틀 전에 그는 여기에서 마적대를 몰살하려 했다.
        하지만 자신이 희생되었지.
        여기에 칼을 맞고 죽었어.
        다른 상처와 확연히 다르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친 거야.
        이런 상처는 여기 하나뿐이야.
        그들 중의 한 명이 단칼에 그의 목숨을 뺏은 거야.
        마적대와 싸울 때 한사람만 주의해.
        검을 왼손에 든 사람.

홍칠공: 난 죽더라도 찾아오지 마시오. 말하는 시체가 되긴 싫소.

[장면 전환]

구양봉: 열 닷새, 맑고 바람이 불었다. 인간사의 선악을 정하는 날.
        핏빛이 있으니 먼길을 피하고 재앙을 경계하라.

(홍칠공, 마적대를 물리친다.)

[구양봉의 집]

구양봉: 돈을 세지도 않고 받는 사람은 그 돈을 금방 다 써 버린다.
        하지만 홍칠은 자세히 세었다.
        이런 사람은 내 곁을 곧 떠난다는 걸 나는 안다.

[장면 전환]

구양봉:  초열흘, 입추, 맑음
         친구를 만나기에 좋은 날이다.

[구양봉 집 앞]

홍칠의 부인: 홍칠?

구양봉: 떠났소.
         다시는 안 올 테니 다른 곳에 가서 알아보시오.
         내 말뜻을 알겠소?

구양봉: 여자를 속이는 건 쉽지 않다. 단순한 여자일수록 그렇다.
         낙타를 버릴 홍칠이 아니기에 그녀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장면 전환]

홍칠공: 고향에서 기다리라니까 왜 자꾸 따라다녀?
        어서 가.

홍부인: 싫어요.

홍칠공: 집으로 가.
        당장 가.
        가, 어서.

[구양봉의 집]

구양봉: 벌써 며칠째 기다리고 있군.

홍칠공: 쫓아도 안 가는데 어쩌겠소?
        마누라와 다닐 순 없잖소?

구양봉: 누가 안된다고 했나? 다 하기 나름이야.
        나도 옛날엔 자네 같았지.
        천하를 얻기 위해선 여자를 버려야 하는 줄 알았지.
        그런데 집에 돌아가 보니 그녀는 내 형수가 돼 있더군.

[장면 전환]

구양봉: 매일 찾아와도 소용없소.
        돈이 없으면 못 도와주니 다른 방법을 찾아보시오.

완사녀: 부탁이에요.

구양봉: 부탁해도 소용없소.
        난 중개인일 뿐이니 부탁하려거든 직접 하시오.

[장면 전환]

구양봉: 열 닷새, 비가 왔다.
        흙이 젖으니 외출은 금물이고 북쪽에 살기가 있다.

(홍칠공 태위부를 찾아가 완사녀 복수를 해준다.)

[구양봉 집], 부상당한 홍칠공

구양봉: 내가 태위부의 검객이라면 죽어도 눈을 못 감았을 것이다.
        그들의 목숨 값이 겨우 달걀 하나이기 때문이다.

구양봉: 달걀이 손가락과 바꿀 만큼 가치가 있나?

홍칠공: 없소.
        하지만 기분은 좋소. 이게 내 본래의 모습이오.
        안 다쳐야 했겠지만 검이 옛날처럼 빠르지 못했소.
        옛날에 검이 빨랐던 건 옳다고 믿고 했기 때문이오.
        대가를 바란 적이 없었소.
        난 평생 안 변할 줄 알았는데
        그 여자에게 부탁 받는 순간 완전히 변해 있는 나를 보았소.
        난 약속을 안했소.
        당신이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그날 난 실망을 했던 거요.
        당신과 지내면서 내 자신을 잃은 채 당신을 닮아 가다니.
        난 당신처럼 되긴 싫소.
        당신은 달걀 하나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진 않겠지?
        그것이 당신과 나의 차이요.

[장면 전환]

완사녀: 홍칠을 구해 줄 수 없나요?

구양봉: 많이 아프다면서요?

완사녀: 의원을 불러 주세요.

구양봉: 의원이요? 돈 들어요.
        달걀이 있으면 몇 개 줬을 텐데..
        낭자는 달걀로 잘 부탁하잖소?
        그는 내 말을 어겼기 때문에 도와주지 않을 거요.
        낭자 때문에 이렇게 됐으니 낭자가 구해 주시오.
        낭자가 날 찾아올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소.
        남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지 않는다고 했죠?
        이번엔 어떻게 하는지 보겠소.

[구양봉 집 안]

홍칠공: 무슨 생각을 하시오?

완사녀: 아니에요.

홍칠공: 날 위해 아무 일도 하지 마시오.
        이번에 죽는다고 해도 난 여한이 없소.
        달걀 때문에 낭자를 도와줬고 달걀은 이미 내가 먹었소.
        그러니 낭자는 빚이 없소.
        바보짓 마시오. 명심하시오.
        낭자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소.

홍부인이 홍칠에게 밥을 먹여 주고 있다.

완사녀 당나귀를 몰고 떠난다.

홍칠공: 그 후로 그 여자를 보지 못했다.

[구양봉 집]

홍칠공: 다시는 검을 못 잡을 것 같소.

구양봉: 검이 없어도 맨손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어.
        손가락 하나만 없는 거니 오히려 도움이 될지도 모르고.
        고향으로 돌아갈 거야?
        이까짓 일로 고향에 갈 거면 애초에 뭐 하려고 나왔어?

홍칠공: 이 사막 너머엔 뭐가 있죠?

구양봉: 또 다른 사막이 있지.

구양봉: 누구나 산을 보면 그 너머엔 뭐가 있나 궁금해한다.   
        막상 산 너머에 가보면 별것도 없다는 걸 알게 되고
        차라리 여기가 낫다고 여긴다 하지만 그는 안 믿을 것이다.
        그는 직접 부딪혀 보기 전에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 성격이다.

구양봉: 어디로 갈 생각이냐?

홍칠공: 안 가 봤던 곳으로 가서 명성을 쌓겠소.
        손가락이 9개뿐인 영웅이 있다고 하면 나인줄 아시오.

구양봉: 부인은?

홍칠공: 데려갈 생각이오. 다 하기 나름 아니겠소?
        마누라를 데리고 다니면 안된다는 법은 없잖소?
        가자.

구양봉: 홍칠이 단순하기 때문에 그녀가 좋아하는 것 같다.
        둘이 가는 것을 보니 질투가 났다.
        내게 똑같은 기회가 있었을 때 왜 포기했는지 모르겠다.
        떠나던 날에 남풍이 불자 그는 일부러 바람을 거슬러 갔다.
        그날은 열 닷새였고 북쪽이 길한 방향이었다.
        홍칠이 떠난 후 계속 비가 왔고 그때마다 누군가가 생각났다.
        그녀는 옛날에 날 좋아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지만 그녀 곁을 떠날 때면 비가 왔다.
        슬퍼서 비가 온다고 말했던 그녀는 나중에 형과 혼인했다.
        그녀가 혼인하던 날 나는 백타산을 떠났다.

자애인과의 옛날 일을 회상하는 장면

자애인(장만옥): 내일 물어 봐도 대답은 같아요. 못 가요.

구양봉: 오늘 밤이 마지막이야. 같이 가자.

자애인: 싫어요, 같이 못 가요. 오늘부터 난 당신 형수예요.
        이젠 당신형만이 내 손을 잡을 수 있어요.

맹무살수의 고향, 도화삼랑과 구양봉 마주침

구양봉: 왜 자꾸 손수건을 보시오?

도화삼랑: 그건 남편 손수건인데 왜 당신이 가지고 있죠?
           그는 죽었나요?

구양봉: 복사꽃(도화:桃花)을 본지 오래돼서
        다음해에 그의 고향(맹무살수의 고향)에 갔다.
        하지만 그곳엔 복사꽃이 없었다.

도화삼랑: 그건 이제 소용없어요

구양봉: 복사꽃은 있지도 않았다는 걸 떠날 때야 깨달았다.
        복사꽃이란 그 여자의 이름이었다.

(도화삼랑, 말에 기대어 운다.)
        그녀가 우는걸 보고서야 황약사가 오는 이유를 알았다.

[바닷가의 어떤 집]

자애인: 아이가 이상해요.
        말도 안하고 웃지도 않아요.
        하지만 말을 안 걸면 상대방을 빤히 쳐다봐요.
        속을 모르겠어요.
        원하는 게 있어도 말은 안하고 손에 쥐어 줘야 가져요.
        처음엔 내버려뒀지만 아젠 신경조차도 안 써요.

황약사: 난 그녀를 좋아하지만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포기가 나을 수도 있으니까.
        난 그녀가 아이를 보면서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안다.
        난 구양봉을 시기한다.
        나는 남에게 사랑 받는 느낌을 알기 위해서 많은 사람을 해쳤다.

황약사: 그와 혼인했을 줄 알았는데 왜 하지 않았소?

자애인: 날 사랑한다고 말을 안했어요.

황약사: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도 있소.

자애인: 난 그 말을 듣고 싶었는데 그는 말해 주지 않았어요.
        너무 자신만만했어요.
        꼭 그와 혼인할 줄 알았는데 난 그의 형과 혼인했어요.
        혼인하던 날 같이 가자는 걸 거절했죠.
        왜! 잃고 나서야 얻으려고 하죠? 그렇다면 난 수긍할 수 없어요.

황약사: 사랑에 승부가 있다고 해도 그녀가 이겼다고는 생각 안한다.
        하지만 난 처음부터 졌다.
        난 이 여자 때문에 복사꽃을 좋아한다.
        매년 복사꽃이 필 때면 그녀를 만날 수 있다.
        그녀가 구양봉의 소식을 궁금해해서 난 구양봉을 만나러 간다.
        구양봉이 있는 한 난 매년 그녀를 만날 수 있다.

자애인: 내게 소중한 게 뭔지 알아요?

황약사: 당신 아들 아니오?

자애인: 옛날엔 그렇게 생각했죠.
        하지만 아이가 성장하면 언젠간 떠나 버리겠죠?
        그래서 모든게 허망해요.
        전엔 사랑이란 말을 중시해서 말로 해야만 영원한 줄 알았죠.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하든 안하든 차이가 없어요.
        사랑 역시 변하니까요.
        난 이겼다고 생각해 왔어요.
        그러던 어느 날 거울을 보고 졌다는 걸 깨달았어요.
        내가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없었죠.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어요.
        그와 친한 사이면서 왜 내 소식을 전하지 않았죠?

황약사: 당신과 약속을 해서 말할 수가 없었소.

자애인: 고지식하시군요.

황약사: 얼마 후에 그녀는 죽었다.
        죽기 전에 술을 주면서 그에게 전해 달라고 했다.
        그녀는 구양봉이 자신을 잊어 주길 바랬다.

[장면 전환]

황약사: 인간이 번뇌가 많은 까닭은 기억력 때문이라 한다.
        그 해부터 난 많은 일을 잊고 복사꽃을 좋아한 것만 기억했다.

[사막 구양봉의 집]

구양봉: 입춘이 지나고 경칩이 왔다.
        이맘때면 친구가 찾아 왔지만 금년엔 오지 않았다.
        그 후 백타산에서 편지를 받고 형수가 2년전 가을 중병으로 죽은걸 알았다.
        황약사가 안 올 줄은 알지만 계속 기다릴 생각이다.
        난 이틀 동안 문 앞에 앉아서 하늘이 변하는 걸 보고서야
        이곳에 오랫동안 있었으면서도 사막도 제대로 못 본걸 알았다.
        옛날에는 산을 보면 산너머에 뭐가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난 기구한 운명으로 어려서 부모를 잃고
        형을 의지해서 자라며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했다.
        거절당하기 싫으면 먼저 거절하는 게 최선이다.
        그래서 돌아가지 않았다.
        그 곳이 좋긴 하지만 이젠 돌아갈 수 없다.
        난 부부 궁합이 나쁜 운세로 혼인은 유명무실하다고 했지만
        이렇게 들어맞을 줄은 몰랐다.
        그날 난 술이 마시고 싶어 취생몽사를 마셨다.
        그리고 계속 내 일을 했다.

구양봉: 나이는 40대 초반인 것 같군요.
        살다 보면 들추기 싫은 일이나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이 있죠?
        당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죽이고 싶었던 적도 있을 테고.       
        하지만 용기가 없었군?
        살인은 아주 쉬운 일이오.
        무공은 뛰어나지만 형편이 어려운 친구가 있는데
        돈만 조금 주면 그 사람을 죽여줄 거요.
        잘 생각해 보시오.

구양봉: 난 할 일이 없을 땐 백타산 쪽을 바라보았다.
        옛날에 그곳엔 날 기다리는 여인이 있었다.
        취생몽사는 그녀가 내게 던진 농담이었다.
        '잊으려고 노력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녀는 전에 늘 말했었다.
        '갖지는 못하더라도 잊지는 말자' 고.
        난 매일 같은 꿈을 꾸었고 얼마 안 가서 그 곳을 떠났다.

(사막에 있는 그의 집에 불을 지르고 길을 나선다.)

        그 날은 불이 쇠를 이기니 서쪽이 길하다고 했다.

출연 인물들의 모습이 지나가며 영화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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